“당신에게 가장 값진 소비는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저는 망설임 없이 “경험, 그중에서도 여행”을 꼽습니다. 물건은 시간이 지나면 낡고, 결국 사라집니다. 반면 여행에서 얻은 감정과 깨달음, 그리고 사람과의 인연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지고 더 빛납니다.
저에게 여행은 단순히 어딘가를 다녀오는 이벤트가 아닙니다. 삶의 방향을 돌려놓는 전환점이자, 제가 어떤 사람인지 끊임없이 되묻는 성찰의 시간입니다. 가령, 스물다섯 살에 떠났던 일본 교토의 새벽 골목, 서른 즈음 방콕 짜오프라야 강 위에서 들었던 배 엔진 소리, 서른다섯 살에 스코틀랜드 하이랜드에서 마주한 끝없는 초원과 구름…. 그 순간들은 지금까지도 제 삶의 중요한 좌표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글은 “여행은 사치”라는 편견을 깨고, 경험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자산이라는 사실을 함께 나누기 위해 쓰였습니다. 혹시 여행을 망설이는 분이 계신다면, 이 글이 등을 살짝 밀어주는 바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미 다녀오신 분들에게는, 그 기억 속에 숨은 의미를 다시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며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낯선 곳에서 발견한 ‘진짜 나’ - 혼자 떠난 첫 여행
두려움 대신 설렘으로 바뀐 순간
제 인생의 첫 홀로 여행지는 일본 교토였습니다. 4박 5일이라는 짧은 일정이었지만, 그 여행은 지금까지도 제 안에서 “용기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당시 저는 첫 직장에서 과도한 야근과 인간관계 스트레스로 지쳐 있었습니다. 어느 날 퇴근길, 지하철 의자에 주저앉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이대로 살아도 괜찮을까?”
그리고 바로 그 주말, 저렴한 항공권을 찾아 표를 예매했습니다. 출발 전날까지 “혼자 여행하다가 길을 잃으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이 가득했지만, 한편으로는 “한 번쯤은 나를 위해 모험해도 되지 않을까?”라는 설렘이 더 컸습니다. 여권을 챙기고, 배낭에 노트와 펜을 넣으면서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골목길에서 만난 전환점
교토에 도착한 첫날 밤, 게스트하우스 공용 라운지에서 만난 뉴질랜드인 여성 여행자와의 짧은 대화가 제 인생의 방향을 15도 정도는 바꿔 놓았습니다. 그녀는 1년간 세계를 돌아다니며 ‘슬로우 트래블’을 실천하고 있었는데,
“돈은 다시 벌 수 있지만, 시간은 돌려받을 수 없어요. 젊을 때 경험을 쌓아두면, 그게 나중엔 가장 큰 자산이 되더라고요.”
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그 한마디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여태껏 저는 ‘지금’보다 ‘언제나 미래’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것이 어른스러운 태도라고 믿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녀는 제게 경험에 투자하는 삶을 제안한 셈이었습니다.
교토의 골목길, 붉은 도리이가 끝없이 이어진 후시미 이나리 신사를 걷고, 우지강 다리를 건너며 저는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돌아온 뒤, 결국 저는 이직을 결심했고, 지금은 자율성이 높은 프리랜서 번역·크리에이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프리랜서의 길은 쉽지 않지만, 내 시간의 주인이 되어야 얻을 수 있는 배움과 자유가 있다는 걸 여행이 먼저 알려주었습니다.
숫자로 세어지지 않는 배움
혼자 떠난 여행에서 얻은 것은 장소 사진이나 기념품이 아니었습니다.
길을 헤매다가도 스스로 해결책을 찾는 문제 해결 능력,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마음은 통한다는 연결의 감각, 낯선 환경에서 ‘나’를 지키는 자존감과 독립성...
이런 것들은 회계장부에 적힐 수 없지만, 어떤 교육비보다 확실한 ‘투자 수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경험치들은 다시 다음 여행, 다음 도전으로 이어져 누적 복리처럼 제 삶을 불려주고 있습니다.
문화는 사람이 만든다 –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넓어진 순간
하노이에서 배운 ‘속도’의 재정의
베트남 하노이에 갔을 때 저는 매일 아침 카페 쓰어다(Cà phê sữa đá)를 마시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현지 청년들과 나눈 대화에서 “한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빨리 살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길거리 좌판에 앉아 셔츠 단추를 천천히 달고, 오토바이 위에서 느긋하게 샌드위치를 먹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 평온한 풍경 속에서 저는 ‘시간을 잘 쓰는 법’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빠름이 곧 효율인 줄 알았던 가치관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죠. 돌아와서는 주말마다 ‘느린 하루’를 실험했습니다. 휴대폰 알람을 끄고, SNS 대신 손글씨로 일기를 쓰고, 동네 공원을 한 바퀴 천천히 걸었습니다. 더 늦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집중력이 높아지고 삶의 만족도가 올라갔습니다. 하노이의 아침이 제 시간 감각을 ‘재포맷’해 준 셈입니다.
몽골 유목민 가족이 알려준 ‘함께’라는 부(富)
몽골 고비 사막 근처에서 만난 유목민 가족은 저를 그들의 게르에 초대했습니다. 그저 우연히 사막 길에서 길을 묻다가 시작된 인연이었습니다. 그들은 많지 않은 유목 가축과 최소한의 가재도구로 삶을 꾸렸지만, 저녁마다 모닥불에 둘러앉아 나눈 차 한 잔, 말젖으로 만든 치즈 한 조각, 그리고 끝없는 하늘을 배경으로 이어진 노래와 웃음.
“부”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조용히 재정의되었습니다. 소유의 양보다 ‘함께’ 나누는 마음의 크기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깊이 느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저는 자연스레 제 물건을 줄이고, 주변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데 더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결국 여행은 제 개인주의적 소비 패턴을 공동체적 경험으로 확장시켰습니다.
현지인의 시선을 빌리면 세상이 달라진다
프랑스 파리의 르 마레 지구에서 만난 여행자 투어 가이드는 “도시는 건물보다 사람의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후 여행에서 유명 관광지 체크리스트보다 로컬 가이드, 동네 책방, 공공시장 등을 찾아다녔습니다. 요르단 암만의 재래시장에서는 “이 향신료를 맛봐야 당신이 진짜 요르단을 아는 거다”라며 상인이 꺼내준 자타르(za'atar)의 향을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문화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다는 사실을요. 타인의 삶을 존중하는 법, 다양성을 호기심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역시 여행이 준 소중한 선물이었습니다.
여행이 남기는 건 기억이 아니라 ‘변화’
여행 이후의 삶이 달라지는 5가지 방식
- 심리적 회복탄력성 증가
낯선 환경에서의 작은 성공 경험(목적지 도착, 맛집 발견 등)은 내면의 “할 수 있다” 근육을 키워 줍니다. 이후 일상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마주해도 “이 정도면 괜찮다”는 여유가 생깁니다.
- 우선순위의 재배열
가령, 스위스 루체른 호숫가에서 본 노을은 “내가 지금 있는 곳,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웠습니다. 자연 앞에서 목표 리스트는 한 발 물러서고, 가치와 의미가 첫줄에 배치되었습니다.
- 지속 가능한 소비로의 전환
발리 우붓에서 만난 친환경 숙소에서는 플라스틱 빨대 대신 대나무 빨대를, 1회용 샴푸 대신 고체 비누를 썼습니다. 여행 중 체득한 에코 마인드는 집으로 돌아온 뒤, 텀블러 사용과 제로웨이스트 상점 방문으로 이어졌습니다.
- 언어·문화 다양성에 대한 개방성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길을 잃었을 때, 현지 할머니가 포르투갈어·스페인어·손짓·웃음을 섞어 도와주셨습니다. “언어가 다르면 어때, 마음이 통하면 되지”라는 확신은, 외국인 동료와 협업할 때도 자연스러운 상호 존중으로 나타났습니다.
- 자기 인식의 확장
칠레 파타고니아 트레킹 중, 끊임없이 이어진 빙벽 앞에서 느낀 무력감은 오히려 ‘겸손’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나는 자연 앞에서 작은 존재지만, 동시에 한계 너머로 나를 밀어 넣을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는 깨달음이 쌓였습니다.
여행을 ‘투자’로 만드는 방법
- 목적 없는 표류도 괜찮다
일정과 체크리스트로 빽빽한 여행보다, 하루쯤은 아무런 목적 없이 동네 카페에 앉아 현지인들의 일상 소음에 귀 기울여 보시길 권합니다. 이 느슨한 시간이 때로는 가장 큰 영감을 줍니다.
- 배움의 앵커 만들기
여행 중 마음을 울린 문장, 풍경, 사람의 표정을 사진이나 메모로 기록해 두세요. 돌아와서 그것을 ‘앵커’ 삼아 일상 속 변화를 설계하면, 여행의 가치는 복리처럼 불어납니다.
- 작은 불편함을 경험하기
꼭 편한 숙소만 고집하지 마세요. 공용 부엌이 있는 호스텔, 시골 마을 게스트하우스에 묵어 보면 예상치 못한 우정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할 때 성장 지점은 더욱 커집니다.
여행 뒤에 남는 것 - ‘나’를 다시 발견한 기쁨
돌아오는 비행기 창문 밖, 새벽빛에 물든 구름을 보며 저는 항상 같은 생각을 합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그 일상은 예전과 같지 않을 거야.”
같은 집, 같은 길, 같은 직장으로 돌아가더라도, 내 시선과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여행은 제가 어떤 가치에 끌리고,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싶은지를 선명하게 비춰주는 거울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새로운 곳에 갈 때마다 물어봅니다.
“이곳에서 무엇을 배우고 싶은가?”
“어떤 두려움을 내려놓고 싶은가?”
“이 경험을 통해 내 삶의 어떤 부분을 업데이트할 것인가?”
그 질문 자체가 여행 이전의 저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자산입니다.
마무리하며 – 경험이라는 자산을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 여행
우리는 자주 물건을 삽니다. 새로운 옷, 최신 스마트폰, 고급 레스토랑의 스테이크.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은 기억에서 흐릿해지거나, 다음 신상품에 자리를 내어줍니다. 반면 여행은 다릅니다.
한 번의 여행은 평생을 지탱해줄 기억이 되고, 그 기억은 삶의 방향키가 되며, 때로는 용기가 되어 돌아옵니다. 여행이 남기는 건 풍경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을 다시 살아가게 하는 변화입니다.
혹시 지금 삶이 답답하고,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게 느껴지신다면 작은 여행부터 시작해 보시길 권합니다. 멀리 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익숙한 도시에서 낯선 골목을 걸어보거나, 고속버스를 타고 당일치기로 바닷가에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삶의 감각은 놀랍도록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여행은 소비가 아니라 삶에 대한 투자
그 투자 수익은 통장 잔고가 아니라 확장된 시야, 단단해진 마음, 깊어진 관계로 돌아옵니다. 그러니 지금, 일정표를 열어 한 칸을 비워 두세요. 그 빈칸이 언젠가 당신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페이지가 될지도 모릅니다.
“경험은 자산이다”라는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도 곧 직접 증명하시게 될 것입니다. 여행이 여러분의 인생 그래프에 찍히는 작은 점 하나가, 언젠가는 큰 방향 전환의 화살표가 되어줄 테니까요.
지금 떠나 보세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기억과 변화를 위해.